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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문학에 취하는 길
강원역사문화기행 ⑧ <메밀꽃 필 무렵>의 평창 봉평


 


 가산 이효석의 고향 봉평은 그의 작품 <메밀꽃 필 무렵>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효석의 문학적 감수성과 메밀꽃의 조화는 봉평에게 축복이었다. 하얀 메밀꽃을 배경으로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 친자의 확인, 장돌뱅이들의 애환을 그린 작품은 지금도 향토적인 어휘와 낭만적 분위기로 봉평 가는 길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 여름 장이란 애시 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지만 장판은 쓸쓸하고 더운 햇발에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칩칩스럽게 날아드는 파리 떼도 장난군 각다귀들도 귀찮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걷다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봉평 재래장터다. 물레방앗간에서의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 된 성서방 처녀와의 인연 후 허생원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된 봉평장, 소설 속 그 무대다. 봉평장의 여파인지 거리마다 사람이 북적거렸다. 사람들을 따라 골목길에 들어서니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들을 그린 현수막과 동상들이 눈에 뛴다. 봉평장 한가운데 충주집터 비석도 서있다. 충주집은 소설에서 허생원과 동이가 처음 만나는 중요한 공간이다. 지금은 집터에 비석만 남아있지만 가산공원 뒤로 가면 복원된 충주집을 볼 수 있다. 

 봉평장은 2일과 7일 열리는 5일장이다. 그날도 장이 열려 메밀전병과 시원하게 얼린 식혜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새콤하면서도 매콤한 김치냄새가 미각을 자극한다. 봉평장에는 메밀전병 메밀만두 메밀막국수 등 메밀로 만든 음식들이 가득하다. 올갱이 국수에 막걸리를 들이키는 할아버지와 갓 따온 나물을 팔러 나온 할머니, 부모를 따라 나와 장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메밀 막국수를 맛보기 위해 줄을 선 방문객들까지, 예전처럼 짐 실은 나귀들이야 보이지 않지만 시끌벅적한 장바닥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90년 문화관광부 ‘문화마을’ 1호 지정, 곳곳에 ‘메밀꽃…’의 흥취
이효석 생가, ‘물레방앗간’ 등 볼거리 다채…5일장 메밀국수도 ‘일품’


 장터를 벗어나자 봉평 중고등학교 앞 가산공원 입구에 이효석 흉상과 문학비가 나란히 서있다. 봉평은 1990년 6월 문화관광부로부터 문화마을 1호로 지정된 곳이다. 효석문화제가 열리는 9월에 봉평을 찾으면 복원된 충주집에서 국밥과 막걸리를 맛보는 체험도 할 수 있다.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하다가 허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디었다. 앞으로 고꾸라지기가 바쁘게 몸째 풍덩 빠져 버렸다…”

 충주집을 지나 걷다보니 맑은 냇물이 흐르는 봉평개울에 다다랐다. 동이가 물에 빠진 허생원을 업고 자신의 출생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개울이다. 소설에서처럼 깊지 않아 발목정도밖에 차지 않는 개울물이었지만 물이 맑고 깨끗하여 헤엄치는 송사리들과 올챙이들을 훤히 볼 수 있었다. 허생원, 조선달, 동이가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 속에 개울을 건넜던 그 징검다리를 건너보니, 세 사람의 달빛 속 동행에 함께 한 듯했다. 괜히 소설속의 허생원처럼 살짝 발을 헛디뎌 맑고 시원한 개울물에 발을 담가 보기도 한다. 봉평 개울을 건너면 소설을 읽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던 장소, 물레방앗간이 보인다. 

 “달이 너무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달빛을 피해 숨어 든 물레방앗간에서 맺은 하룻밤 인연은 <메밀꽃 필 무렵>을 읽어 본 이들이 가장 기억하는 장면이다. 드팀전(피륙가게) 장돌이면서 얼금뱅이 허생원이 봉평에서 대화장 가는 산허리 밤길 때마다 조선달에게 들려주는 물레방앗간 인연도 달빛 탓이고 젊은 시절 ‘꼭 한 번의 첫 일을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것 역시 숨이 막힐 듯 새하얀 달빛을 닮은  메밀꽃 밭이다. 힘차게 돌아가는 물레방앗간 소리에 소설 속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의 만남이 떠올라 괜스레 얼굴이 붉어진다.

 애끓는 첫 정분의 장소에서 걸어 15분쯤 거리에 가산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달려온 생가에는 1930년대 소설 속 배경을 연출한 농가가 한 채 있다. 사실 지금의 생가는 그 터에 새로 지은 집으로 이효석의 유택이라고도 전해진다. 이효석 생가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어릴 적 가산이 경험한 봉평 땅의 아름다운 경치와 순수한 시골인심이 후에 주옥같은 영서(嶺西) 3부작 <메밀꽃 필 무렵> <개살구> <산협>의 배경이 된 건 확실하다. 생가에서 내려오면 마구간에 매어져 있는 나귀들을 볼 수 있다. 구경하러 가까이 갔더니 도망가지도 않고 오히려 눈을 말똥거리면서 빤히 바라본다. 허생원이 장에서 팔 물건들을 나귀등에 싣고 다니기도 하고 허생원과 동이가 서로 마음을 열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하는 나귀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다. 이 녀석들이야 자신의 역할을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는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이야.…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독백처럼 들리는 허생원의 말을 통해 작가는 성 본능의 탐구를 시적인 묘사와 문체, 서정적인 필체로 담아낸 것은 아닐까. 생가와 가까운 이효석문학관에 들르면 언어의 마술사 이효석의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문학관은 심미주의자로서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이며 모더니스트이기도 했던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맞춰 볼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다. 유품과 초간본 책, 그의 작품이 발표된 잡지와 신문 등이 전시돼 있으며 옛 봉평장터 모형도 볼 수 있다.

 소설 속의 발자취를 따라 찾아온 봉평에는 문학과 자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꽃처럼 방문객들을 반긴다. 돌아오는 차편에 올라 봉평장에서 산 메밀만두를 한입 베어 무니 입가에 향긋한 메밀향이 오래도록 맴돈다. 꽃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문학에 취하니 돌아오는 발걸음이 아쉽기만 했다.
김해현·김주애 기자


 

 

강원희망신문 2012.08.12(일) 16:25 김해현·김주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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